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하이네 (문단 편집) == 생애 == 1797년 뒤셀도르프에서 유대계 가문의 4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그의 집안은 독실한 [[유대교]] 집안은 아니었다. 어릴때 잠깐 유대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하이네는 가톨릭 재단이 세운 김나지움으로 진학했을 뿐더러, 궁극적으로 프로이센 당국의 유대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 1825년에 신교도로 개종한다. 하이네 본인은 신교도로 개종하고 나서 일신의 이득을 위해 신념을 져버렸다면서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도 라인란트 출신인데, 하이네와 혈연적으로 먼 친척관계이다.] 아버지는 직물 상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의사의 딸로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하이네의 어린 시절은 유복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유년기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그의 고향이었던 라인란트의 뒤셀도르프 역시 아예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된 상황이었다. 바꿔 말해서 하이네는 어린 시절 프랑스의 영향을 가득 받으면서 자라날 수 있었고, 이는 (아버지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파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생토록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파산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성공한 상인이었던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하이네를 [[함부르크]]로 데려와서 양육했는데, 여기서 하이네는 상인이 되고자 상업과 영어[* 물론 19세기 초에도 유럽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불어였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의 경제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영어 역시 그 중요도가 급부상했다. 게다가 하이네 가문은 직물업에 종사했는데, 초기 산업 혁명의 핵심은 직물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영어를 배울 수 밖에 없었다.]를 학습했다. 그렇지만 하이네는 상업에는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이에 따라 숙부는 법을 공부할 것을 하이네에게 지시하면서 1819년 하이네는 본 대학교 법과로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법학 역시 하이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고,[* 훗날 《회상록》(Memoiren)에서 "이기주의의 성경인 [[로마법 대전]]은 얼마나 끔찍한 책인가!"(Welch ein fürchterliches Buch ist das Corpus iuris, die Bibel des Egoismus!)라고 디스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오히려 대학교를 다니는 시기 내내 하이네는 역사 및 문학 공부와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 투쟁에 활발하게 가담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시인 및 극작가로 데뷔한 것도 본에서의 일. 이후 [[괴팅겐 대학교|괴팅겐]]과[* 정작 하이네는 두고두고 괴팅겐에서의 지낸 나날들을 혐오했다. 당시 괴팅겐은 [[하노버 왕국]]에 소속되어있었는데, 하노버 왕국은 독일 연방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국가였고 자유주의 성향의 하이네에게 하노버의 보수적인 법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죽을 맛이었을 뿐더러,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생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멘탈이 터져서 그 남자와 결투를 벌이다가 정학을 먹기까지 한다.] [[베를린대|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닌 후 1826년에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상인들의 자유도시였던 함부르크는 당시 독일 연방 내에서 가장 [[검열]]이 느슨한 국가였기 때문에 하이네는 비교적 마음 놓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26년 낭만주의 성향의 <여행그림들(Reisebilder)>을 출간한 데 이어 다음해인 1827년에는 <노래들의 책(Buch der Lieder)>을 출간하는데, 특히 <노래들의 책>은 처음에는 평범한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나중에 [[로베르트 슈만]]을 비롯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가곡으로 써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하이네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슈만의 가곡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이네를 낭만주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1827년 이후 하이네는 낭만주의 성향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를 조롱하는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827년 이후 하이네는 사회 비판 및 풍자시를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데, 특히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퍼져나가고 있던 [[민족주의]]와 독일 당국의 [[검열]] 제도가 주 타켓이었다. 아래는 민족주의와 검열에 대한 풍자가 가득 담긴 하이네의 이 무렵 시들. >게르만족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하지만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참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만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마니아의 맥주 세르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게르마니아]]> 열풍을 비꼬는 풍자시에서 > 독일 겸열관들은 ... ... ... ... ... ... (Die deutsche Zensoren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머저리들이다 (... ... ... ... ... ...Dummköpfe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속의 산문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 여행을 거친 하이네는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7월 혁명]]의 열기가 식지 않은 자신의 이상향 프랑스로 이주한다. 이후 그가 사망하는 1856년까지 그는 쭉 파리에 머무르게 된다. 꾸준히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한편으로[* 불어를 할 줄 알았지만 회화에서는 독일어 억양이 잔뜩 묻어있었고, 글쓰기도 그리 능숙하지는 않아서 작품을 독일어로 쓴 뒤에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같은 주변 프랑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불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또한 하이네의 영향을 받아서 1840년을 전후로 독일 내에서는 청년독일파라는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 문인들의 모임이 결성되는데, 하이네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들 청년독일파는 [[유미주의]]를 배척하고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시 속에 반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청년독일파 중에서 문학적 가치와 현실 비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는 사실상 하이네 뿐이다.] 1841년에는 파리에서 구두상점 점원으로 일하던 18세 연하의 여성 마틸드(애칭으로 본명은 Crescence Eugénie Mirat)와 [[동거]] 끝에 결혼하기도 했다.(둘 사이에 자녀는 두지 않았다.) 한편 1843년부터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신문 지면에서 마구 비판하다가 결국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을 온 [[카를 마르크스]]와 교제를 하기 시작한다. 망명객이라는 공통 분모로 인하여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하이네는 마르크스의 공산 혁명 개념을 "예술 작품과 예술가들을 파괴시킬 끔찍한 생각"이라며 반대한데다 결정적으로 마르크스가 파리에서도 프로이센 국왕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다가 프랑스 당국에 의해[* 프로이센 당국이 마르크스를 추방시킬 것을 요구했다.] 결국 벨기에로 추방되면서(이후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다시 이주해서 엥겔스와 함께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는 한편 [[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둘 사이의 교류는 끝을 맺는다.[* 이후로도 이따금씩 서신을 주고 받기는 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게 인지상정인지라..] 게다가 1847년 오랫동안 재정적으로 그를 후원해온 숙부 잘로몬 하이네가 사망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하이네는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848년 신경계통의 문제로 인하여[* 방탕한 성생활로 인한 성병으로 추측되며, [[납]] 중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상반신이 마비되어 하이네 본인의 표현을 쓰자면 '침대 무덤(Matratzengruft)'에 갇히게 되었고[* 하이네가 사망하는 1856년까지 8년 동안 이 '침대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시력도 크게 악화되는 악재까지 뒤따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이네는 활발하게 정치 참여를 하는 한편[* 그가 쓰러진 1848년은 [[1848년 혁명|유럽 전역을 뒤흔든 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제2공화국|제2공화정]]이 수립되었고, 독일에서도 일시적으로 자유주의 체제가 수립되어서 하이네를 크게 고무시켰다.], 작품 활동도 병행하였으나 이미 약해진 몸은 이러한 활동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1856년에 숨을 거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